(서울=연합인포맥스) 어느 순간부터 정치권에서 추가경정예산(추경)은 너무나도 쉽게 내뱉어 소비되는 말이 돼 버렸다. 민생이라는 말로, 취약계층 지원이라는 말로, 경기부양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최근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아침 회의에 단골로 등장하는 게 추경이다. 최고위원회의, 원내대책회의, 정책조정회의 등 매주 주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서 추경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는다. 당 대표부터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최고위원들까지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한다.

[그래픽] 국가채무 추이
(서울=연합뉴스) 이재윤 기자 = 감사원은 정부의 2022회계연도 국가결산 검사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31일 밝혔다. 결산보고서를 보면 작년도 국가채무(중앙정부 기준)는 총 1천33조4천억원으로 1천조원을 돌파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8.1%로 전년도보다 2.8%포인트(p) 높아졌다. yoon2@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페이스북 tuney.kr/LeYN1

[그래픽] 한국 국가경쟁력 순위
(서울=연합뉴스) 원형민 기자 =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평가대상 64개국 중 28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IMD는 이런 내용을 담은 '2023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를 20일 발표했다. circlemin@yna.co.kr 페이스북 tuney.kr/LeYN1 트위터 @yonhap_graphics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35조원 추경 편성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19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35조원 추경 편성을 촉구하면서 세부 필요 항목들을 열거했다. 금융 취약계층에 대한 긴급생계비 대출과 중소기업·자영업자에 이자와 고정비를 지원하는 데 12조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에너지 물가 지원과 소상공인·자영업자·농업인을 위한 가스·전기요금 지원, 지역화폐 예산 증액 등에 11조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 미분양 주택 매입 후 공공임대 전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배드뱅크 설립 등에 7조원이 필요하다는 명세서도 내놨다.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디지털 인프라 분야에 4조4천억원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서민과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경기회복을 위한 각종 인프라에 재정을 더 쓰자고 할 수 있다. 예산 편성과 집행권을 갖지 못하는 야당 입장에서 정부에 그렇게 촉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긴급하게 재정을 추가로 투입해야 할 만큼의 시급성이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무엇보다 경제주체들이 소중하게 벌어 기꺼이 세금으로 낸 돈을 함부로 써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꼼꼼히 살펴야 한다. 법적 요건에만 맞는다면야 정부와 여야가 머리를 맞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나랏돈을 함부로 쓸 수 없도록 법으로 명확하게 통제하고 있다. 특히 추경은 더욱 그렇다. 국가재정법 89조는 추경을 편성할 수 있는 요건을 분명히 정해놓고 있다. '전쟁과 대규모 재해, 경기침체, 대량실업, 남북 관계 변화, 경제협력과 같은 중대한 대내외 여건 변화와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해야 하는 지출 발생 및 증가'가 그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요구하는 세부 항목들이 이 요건들 어디에 포함되는지 사실 잘 알지 못하겠다. 내년도 예산을 짤 때 반영해 달라고 한다면 모를까 올해 예산이 아직 다 쓰이지도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항목들을 들이대 나랏돈을 쓰겠다고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 우려되는 것은 여전히 글로벌 긴축 상황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돈을 풀기 위해 빚을 더 내야 하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올해 4월 기준으로 1년 전보다 덜 걷힌 세수는 33조9천억원에 달한다. 이러한 세수 부족 상황은 정부의 재정 운용에 상당한 제약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부족한 세수를 빚으로 메우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정부가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계획한 국채 순증 발행액만 61조원에 달한다. 이미 61조원의 빚을 내 예산으로 쓰겠다고 국회에서 동의받은 상황이다. 그런데 추경을 한다면 국채를 수십조원 더 발행해야 한다. 세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돈이 나올 구멍은 없으니 고스란히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으로 눈을 돌려보자.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이후 출렁이던 채권시장은 금융·통화당국의 지나칠 정도의 관리로 크게 안정됐다. 금융사도 기업들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치솟던 대출금리도 크게 낮아져 금융소비자의 금리 부담도 다소 경감됐다. 물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추가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어서 언제든 변동성은 커질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찾았을 뿐이라는 얘기지 완전히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수십조원의 국채를 채권시장에 던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채 금리는 우리나라 모든 채권 금리의 기준이다. 국채 발 '물량 폭탄'이 또다시 채권시장 변동성을 키울 수 있는 방아쇠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보는 눈초리도 심상치 않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지난 20일 발표한 '2023년 국가경쟁력 평가'를 보면 이러한 점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경제성과'와 '고용', '물가' 등의 평가항목에선 순위가 모두 올랐지만, '재정'은 조사 대상 64개국 가운데 40위로 1년 만에 무려 8개 계단이나 떨어졌다. 일반정부 부채의 실질 증가율은 34위에서 56위로 급락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48% 수준으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가파른 국가부채의 증가 속도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이러한 급속한 국가부채 증가는 결국 국가신인도와 연결되고 그 결과물은 국가신용등급에 반영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이 당장 떨어질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 그러나 국가신인도에 대한 글로벌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한다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공공기관과 기업들에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금리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랏빚 내는 것을 너무 손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재정지출을 너무 옥죄는 것도 문제이지만, 재정을 지나칠 정도로 방만하게 쓰는 것은 더 문제다. 더 이상 추경이 습관이 돼선 안 된다. 그 습관의 결과물이 참담함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회적 합의를 하는 게 우선이다. (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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